그러나 정작 목표인 히틀러는 고막이 터지고 좌반신에 화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엉망이 된 히틀러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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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우펜버그 대령은 들 것에 히틀러의 외투로 덮힌 사람이
운반되어 나오자 그는 히틀러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그의
부관과 함께 즉시 비행장으로 달려가서 하잉켈 111폭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제 쿠데타 거사의 깃발만 올리면 되는 순간이었다.
회의장 자리 배치도 1번이 히틀러, 24번이 슈타우펜버그자리
그리고 22번 위 붉은 네모가 폭탄이 있던 자리, 붉은 동그라미들이
폭발로 죽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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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4시 30분에 베를린으로 도착해서 본부로 달려가 보니
거사는커녕 이미 폭발 결과에 대한 정보가 일부 흘러 들어가서
히틀러의 죽음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여러 가담자들이 주저와
불안으로 쿠데타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혼란을 극복하고 발키리 작전을 발령해서
상황을 틀어쥐었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히틀러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 이미 주모자들 사이에 다 떠돌아서
쿠데타에 등을 돌리거나 배신을 할 준비를 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슈타우펜버그와 벡크 상장, Olbricht장군, 그리고 몇몇의 동조자들은
단지 몇 시간 동안만 베를린을 통제 했을 따름이다.
이미 히틀러가 안 죽었다는 뉴스가 라디오를 타고 전 독일에
퍼진 상태였다.
밤 9시에 쿠데타는 이미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의 중요한 동조자들, Tresckow대령이나 Ouster중령등
몇 명이 이 때부터 자살로 끝을 맺었다.
두 시간 뒤인 11시에 슈타우펜버그는 히틀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바꾸고 그를 체포하러온 Otto Ernst Remer 소령
부대로부터 도주하려다가 성한 한 팔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자정이 넘은 12시 30분에 그는 발 빠르게 배신한 프롬이 급히 개정된
형식적인 군사재판에서 다른 세 명의 주모자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줄타기를 하다가 역시 처형된 프롬
히틀러가 특별히 인심을 써서
교수형이 아닌 총살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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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의 음모 가담을 감추는 입막음을 위해서였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로 조명한 가운데 집행된 총살 형장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 우리의 신성 독일 만세!-"라고
외쳤다.
프롬이 그렇게 발 빠르게 배신했음에도 독일의 게쉬타포
사령관 히믈러는 프롬을 체포했다.
그리고 그도 역시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독일 군 부내에 대 숙청이 있게 되었다.
무려 7,000명이 체포가 되어서 이중 4,980명이 처형되었다.
그 중에 처형대신 음독을 권유받고 자살했던 에르빈 롬멜 원수도 있다.
처형된 사람 중에 동생의
거사에 가담했던
슈타우펜버그의 형도
있었다.
해군에 몸담고 있었던
전직 법학대학원
교수였던
Berthold Schenk Graf von Stauffenberg였다.
슈타우펜버그의 형 베르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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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증오에 가득 찬 히틀러가 고안해낸 인민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피아노 줄로 목을 묶고 정육점 갈구리에
매달아서 서서히 질식시켜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잔인한 처형 방법 역시 히틀러가 고안해서 지시한 것이었다.
슈타우펜버그는 총살당한 후 급히 매장되었지만 SS부대는
그의 유체를 다시 발굴해서 화장해버렸다.
그 매장자리에 기념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슈타우펜버그의 부인 니나와 그의 네 자식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이미 막내딸을 임신했던 니나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서 그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딸을 낳고 길렀다.
슈타우펜버그의 자녀들은 공립 고아원으로 보내져 강제로
슈타우펜버그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마이스터라는 이름이
대신 주어졌다.
전후에 열린 그의 서거 20주년 추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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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연합국에게 독일이
패망한 뒤였다.
기적적으로 가족중 아무도 이 시련을 거치면서 죽지는 않았었다.
슈타우펜버그의 큰 아들은 나중에 서독군이 새로 탄생하자
바로 임관하여 38년간 복무하고 육군 소장으로 은퇴했다.
슈타우펜버그의 장남 베르홀트 슈타우펜버그 소장 . 현재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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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생 뤼드빅은 역시 변호사 출신으로 지금 유럽의회
의 의원이다.
슈타우펜버그는 갔지만 남은 자식들은 훌륭히 커서 똑똑한
구실들을 했다.
그의 어머니이며 슈타우펜버그 대령의 부인 니나는
2006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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